
2025년 현재, 일본 엔화 약세가 장기화되면서 한국과 중국 등 동아시아 주요 수출국의 경쟁 구도가 급격히 변하고 있다. 엔저는 일본 기업의 수출 경쟁력을 높이는 동시에, 주변국의 무역수지와 산업 구조에 직접적인 압박을 가하고 있다. 단순한 환율 변동이 아니라, 이번 현상은 동아시아 경제의 판도를 새롭게 그리는 구조적 변화의 신호라 할 수 있다. 본 글에서는 엔저 현상의 근본적인 원인과 일본의 전략, 그리고 한국을 비롯한 주변국들의 대응 방향을 심층적으로 분석한다.
엔저의 원인과 일본 경제의 전략
엔저 현상은 단순히 외환시장에서의 일시적 결과가 아니라, 일본 정부와 일본은행(BOJ)의 정책적 판단이 결합된 구조적 결과다. 일본은행은 2022년 이후 전 세계적인 금리 인상 흐름 속에서도 초저금리 기조를 고수하며, 글로벌 긴축 기조에 역행하는 행보를 보였다. 이는 자국 내 경기부양과 수출 확대를 노린 전략적 선택이었다. 그 결과 2025년 들어 1달러당 160엔 수준까지 엔화가 약세를 보이고 있다. 일본 정부는 이를 통해 자동차, 기계, 반도체 장비 등 수출 주력 산업의 가격 경쟁력을 강화하는 효과를 얻고 있다. 실제로 2024년 대비 일본의 수출액은 두 자릿수 증가율을 기록하며 글로벌 시장 점유율을 회복하고 있다.
그러나 엔저의 명암은 분명하다. 수출 기업은 호황을 누리지만, 수입 의존도가 높은 일본 내 소비자는 부담을 안고 있다. 에너지, 식료품 등 주요 수입품의 가격이 상승하면서 소비자 물가가 오르고, 실질 임금은 오히려 감소했다. 엔저는 기업에게는 기회이지만 국민에게는 부담이 되는 ‘양날의 검’으로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일본 정부는 단기적으로는 수출 확대를 통한 경기 부양을 기대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인플레이션과 소비 위축이라는 부작용을 관리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결국 엔저 전략은 ‘단기 수출 호황 vs 장기 내수 침체’라는 딜레마를 내포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 수출 산업의 위기와 대응
한국은 전통적으로 반도체, 자동차, 기계, 화학 제품 등 주요 산업에서 일본과 글로벌 시장을 경쟁해왔다. 그러나 엔저로 인해 일본 제품의 가격 경쟁력이 급상승하면서 한국 수출기업의 수익성이 눈에 띄게 악화되고 있다. 예를 들어 일본 자동차 브랜드들은 엔저로 인한 원가 절감 효과를 활용해 동남아 시장에서 차량 가격을 10% 이상 인하했고, 이는 현대·기아차의 점유율 하락으로 이어졌다. 반도체 장비, 정밀기계, 공작기계 분야에서도 일본 기업들은 가격 인하 공세를 통해 시장을 빠르게 잠식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 정부와 기업들은 환율 경쟁보다는 기술력 중심의 경쟁 전략을 강화하고 있다. 정부는 수출금융 지원 확대와 환변동 보험 강화를 통해 기업의 단기 환위험을 완화하고 있으며, 산업 전반의 기술혁신 중심 구조 전환을 추진 중이다. 특히 반도체, 2차전지, 친환경 소재 등 고부가가치 산업을 중심으로 한 수출 다각화 전략이 핵심이다. 단순한 가격경쟁에서 벗어나 품질, 지속가능성, 친환경성을 강조하는 ‘프리미엄 수출 전략’이 확대되고 있다. 이러한 방향 전환은 단기적으로는 일본의 저가 공세에 밀릴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산업 경쟁력을 높이는 기반이 될 것으로 평가된다.
한국 기업들도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 있다. 일부 제조업체들은 생산 거점을 일본 대신 동남아나 유럽으로 분산하며 환율 리스크를 줄이고 있고, 첨단 기술 분야에서는 일본을 능가하는 품질과 효율을 앞세워 글로벌 시장 재공략에 나서고 있다. 또한 원자재 수입 의존도를 줄이고 자국 내 부품 생태계를 강화하는 등 ‘내재화 전략’도 가속화되고 있다. 이런 대응은 단순한 환율 방어가 아니라 산업 구조의 질적 전환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동아시아 경제 질서의 재편
엔저는 일본의 경제정책을 넘어, 동아시아 무역 구조 전반을 재편하는 촉매제가 되고 있다. 일본의 수출 증가로 인해 한국과 중국의 무역흑자 폭이 줄어들고 있으며, 이는 동아시아 내부 경쟁을 더욱 치열하게 만들고 있다. 특히 한국·일본·대만 간의 기술 경쟁은 공급망 안정성, 원자재 확보, 환율정책 등 다층적인 영역에서 맞물리며 새로운 경쟁 질서를 만들어내고 있다.
한편, 중국은 위안화 약세 압력에도 불구하고 내수 중심의 ‘쌍순환 전략’을 강화하며 수출 의존도를 줄이려 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중간재와 첨단 부품의 수출 비중이 높아 환율 변동에 상대적으로 민감할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해 한국은 기술 혁신과 글로벌 공급망 다변화를 통해 외부 충격을 완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결과적으로 동아시아는 환율 중심의 단기 경쟁에서 벗어나, 기술력·친환경성·디지털 혁신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경쟁 체계로 이동하고 있다.
특히 반도체, 2차전지, 로봇, 인공지능 산업에서의 주도권 다툼은 단순한 산업 경쟁을 넘어 국가 전략의 핵심으로 부상하고 있다. 일본은 엔저를 발판으로 가격 경쟁력을 높이고, 한국은 기술과 품질로 맞서며, 중국은 내수 시장을 기반으로 독자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다. 세 나라는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지만, 이 경쟁은 결과적으로 동아시아 산업 전반의 혁신 속도를 가속화시키고 있다.
엔저(円安)는 2025년 동아시아 경제의 핵심 키워드로 자리 잡았다. 일본의 수출 경쟁력이 강화되면서 한국과 중국의 수출 환경은 급격히 바뀌고 있으며, 각국은 이에 대응하기 위한 새로운 경제 전략을 모색 중이다. 한국이 이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단순한 환율 대응을 넘어, 산업 구조의 혁신과 기술 중심 성장으로 나아가야 한다. 특히 글로벌 경기 둔화와 금리 불확실성이 맞물린 상황에서, 환율 의존형 수출 모델은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다.
지금 필요한 것은 환율에 휘둘리지 않는 ‘질적 성장’이다. 기술 경쟁력, 브랜드 가치, 친환경 경영, 인적 자본 투자 등 비가격적 요소가 기업의 성패를 좌우하게 될 것이다. 엔저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구조적 변화의 신호라면, 한국은 이에 맞서 산업 생태계를 한층 견고하게 만들어야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환율의 높낮이가 아니라, 국가 경쟁력을 얼마나 내실 있게 구축하느냐다. 환율은 변하지만, 기술과 혁신은 남는다. 지금은 단순히 ‘엔화가 싸졌다’는 뉴스를 넘어서, 환율이 세계 산업지도를 다시 그리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할 때다.